루이 비통의 루이비통 이야기 브랜드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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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뉴스

루이 비통의 루이비통 이야기 브랜드스토리

by 오늘맑음🌞 2019. 11. 6.

안녕하십니까!

브랜드스토리 마스터피스입니다.

오늘은 루이비통의 이야기를 해보려고합니다

글이 길고 이것저것 많은이야기를 하지만

끝까지 읽어보시면서 킬링타임으로 생각해주시면 좋을것같습니다

그럼시작하겠습니다!

제시카 심슨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1990년대 유명세를 날린 가수이죠

이분은 이런 이야기를 남기게 됩니다.

"캠핑을하러 가는데 루이비통 가방을 가져가는 게 이상한가요?"

일반인들에게는 루이비통은 명품백 명품 그자체로 받아들여

캠핑, 여행에서는 너무 사치부리는게 아닌가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녀는 루이비통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이였습니다.

루이비통의 시작에 대해서 말이죠

루이비통

세계 최초로 사각형 여행 트렁크를 만들어낸 루이비통입니다.

오늘날 세계 최고의 명품브랜드로

국내에서는 3초마다 한번씩 볼 수 있다고하여

"3초백"

이라는 별명이 있을만큼 대중적인 명품브랜드

루이비통에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루이비통의 어릴적 꿈은 "목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피에르 뷔통은 목공수를 운영했기에

아버지를 따라 목수가 되는것이 꿈이였던것이죠

나무를 다루는 법을 익혔던 루이비통

하지만 큰그릇이 될 루이비통의 팔자였던것일까요?

14세의 루이비통에게는 자신의 고향 프랑스 쥐라주는 너무도 작게 느껴져

큰도시의 대한 갈망을 가지고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에게 루이비통은 파리에 가고싶고 그곳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피에르비통은 어린 루이비통이 걱정되기도하여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외국의 자유로운 정신과 루이비통의 삶의 개척정신은

루이비통을 파리로 향하게 만들었습니다.

단지 그 한가지 넓은 세상의대한 그 갈망 그한가지로

자신의 고향에서 400km 떨어진 파리로 향하게됩니다.

파리로가는 1년동안 중간 중간 식당과 마구간 알바를하며 여비를 챙기고 걸어서 도착합니다.

그렇게 파리에 입성하게 된 루이비통은 먹고살기 위해 

가방가게의 구인구직을 보게 되었고

이곳을 계기로 루이비통이라는 명품이 생겨나는 계기가 됩니다.

가방만드는일을 배운적이 없던 루이는 손님들의 짐을 싸주는 알바를하였습니다.

일명 패커맨이라고 하는 일이였죠

당시 프랑스의 가방가게들은 판매뿐만이 아닌 부유층의 짐을 대신 싸주는 일도있었습니다.

그런데 루이비통의 재능이 여기서 발휘하게됩니다.

짐싸는 실력이 결국 들통나버립니다.

입소문으로 인해 파리전체가 루이비통의 실력을 알게되죠

루이비통을 중심으로 그에게 짐싸기 요청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지게됩니다.

외제니 황후

그 당시 짐을 싸는 하인의 실력을 못마땅히 여겼던 외제니 황후는 어린 루이비통을 황실로 불러들여 

짐싸기 테스트를 진행하게 됩니다.

짐싸기 시험에 통과한 루이비통은 외제니 황후의 공식 패커가 되어 왕실에 가두어져 짐싸기를 시작합니다.

30살에 이를때까지 말이죠

이렇게 10대부터 30살이 왕실에서 짐만싸며 생활한 루이비통에게

어느날 외제니 황후는 짐싸는 하인으로 두기에는 너무 재능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시작합니다.

참 빨리도 생각하네요 그쵸

외제니 황후는 루이비통이 그제서야 안쓰러웠는지

왕실에서 가방만 봐왓던 루이비통에게 33살이 되던해 

왕실의 후원으로 루이비통의 이름으로 가방가게를 차려주게 됩니다.

한편 그 당시 교통수단이 하루가 다르게 발달하게 되면서 여행을 떠나는 부유층이 많이지게됩니다.

치장하며 멋부리는거를 좋아하는 귀부인들은 여행을 갈때마다

값비싼 옷가지를 수십개의 나무 트렁크에 담아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트렁크는 오늘날의 캐리어와 다르게 운반하기가 굉장히 불편한 디자인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여행트렁크 생김새

마치 위에가 둥글고 차곡차곡 쌓아올릴 수가 없었던 것이였죠

이런부분들을 개선하려고 루이비통은 위에를 사각으로만들고 쌓으면 편리하다고 생각을하여

당시에는 굉장히 혁명적인 개발을 하게됩니다.

사각 트렁크의 등장이였던 것이였죠

루이비통 사각 트렁크

1854년 루이비통은 그레이 트리아논 캔버스로 제작된 사각 형태의 트렁크를 대중들에게 내놓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최초의 사각 트렁크였습니다.

사각형태의 트렁크는 몇개라도 겹쳐쌓아 올려 운반하기가 쉬웠으며 

게다가 표면 소재도 가죽이 아닌 방수 캔버스를 사용해

비가와도 젖지 않으며

가방내부의 칸막이를 통해 옷을 비롯한 소지품 정리까지 가능하였습니다.

이러한 편리한 트렁크덕에

귀족들 뿐만 아니라 왕실에서까지도 

주문대란이 일어나며

루이비통은 짐싸는 직원이아닌

최고의 가방 제작자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가게를 오픈한후 5년만에

공장을 설립해 수백 명의 직원을 거느리게 되는 루이비통

루이비통 아니에르

그리하여 어느새 노년에 접어든 루이비통은 1859년 아들 조르주 루이비통에게

사업을 물려줍니다.

그 또한 아버지의 핏줄인게

아이디어가 넘치고 솜씨가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좌 루이비통  우 조르주 루이비통

1867년 파리 세계 박람회에서 

동메달을 수여받아 자신의 재능을 입증받았습니다.

(그 당시 금메달은 에르메스가 수여하였습니다.)

하지만 루이비통의 눈부신 성장과 더불어 악재가 있었으니

그것은 루이비통의 모조품 짝퉁이였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모조품들이 나오고있죠

루이비통의 앞 스펠링을 고쳐 Luis 를 Ruis 로 바꿔 같은 문양을 판매하게 되는데요

이런 이유로 1872년 모조품 방지(그 당시 무늬가 없던 루이비통)를 위해

루이비통은 줄무늬 트렁크를 만들게 됩니다.

루이비통의 줄무늬 트렁크

 

조르주 비통은 그 이후 뛰어난 아이디어로 획기적, 실용적 여행가방을 연이어 선보이게 됩니다.

 

침대가 되는 트렁크 콩고 탐험가 피에르를 위해 제작 / 옷걸이와 서랍이 달린 트렁크

 

루이비통의 명성은 프랑스를 넘어 해외로 뻗어나가

영국과 미국에도 루이비통을 구입하려는 소비자들로

1885년 런던과 뉴욕 매장을 오픈하며 

전 세계적인 브랜드로 거듭나게 됩니다.

"루이비통  이미지의  탄생"

이렇게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많은 소비자들이 구입하면 할수록

모조품도 더욱더 많이 발전하고 재능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모조품 방지를 위해 다시한번 탄생하게 되는것이

1888년 세상에 선보인 격자무늬의 

다미에 패턴입니다.

다미에 패턴

그 시절에도 루이비통은 상당히 고가의 브랜드였습니다.

루이비통이 세계 최고의 명품으로 올라설수 있던것은

19세기 당시 사치가 절정에 올랐던 귀족사회의 영향이 매우 컸습니다.

당시 귀족과 왕족들은 명품 구입에 푹 빠져 버렸고

비싼 의복과 악세사리에 상상을 초월하는 돈을 썻습니다.

 

미국에서 등장한 신흥 부유층 또한 다를바없었습니다.

하지만 귀족과 왕족들이 아니고서는

명품브랜드는 엄두도 낼수없었습니다.

그대신

사람들은 명품 브랜드와 디자인은 똑같지만

훨씬 저렴한 모조품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고

이렇게 짝퉁산업은 엄청난 발전을 이루어내며

조르주 루이비통은 다시한번 모조품을 떨쳐내기 위해 머리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루이비통 모노그램

당시 아르누보가 유행이였던점과 함께

루이비통의 앞글자 L과 V를 이용해

꽃과 별무늬 그리고 LV를 겹친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다표적으로 남는 이미지

모노그램이 탄생하게 됩니다.

조르주의 모조품 방지를 위한 노력은 

모노그램의 상표등록을 통해

모조품들의 불법 행위를 처벌하게 됩니다.

파리에서 처음으로 열린 모조품 재판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었죠

그 후 조르주 루이비통은 모노그램을 이용하여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한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내기 시작합니다.

TEA SET

여행자 편의를 위한

티세트 트렁크

당시에 타자기를 보관하고 운반할수있는

타자기 트렁크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여행자들을 위해 트렁크 겉면에 가방 주인의 이니셜을 새겨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여행을 위한 가방을 만드는 만큼 중요한

내구성에도 큰 노력을 기울였는데요

당시에는 가방의 내구성을 실험할 만한 기구들이 없었기에 

자신이 직접 가방을 들고 실험에 나섰습니다.

튀니지 사막도 횡단하였다고 하네요

이런 장인정신으로 인해

대를 물려서 쓸 수 있을정도로

루이비통의 가방은 튼튼하다고 합니다.

파리는 서쪽지역의 발달이 크게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1914년 루이비통은 매장의 위치를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로 옮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루이비통의 본점이 되게 됩니다.

루이비통 본점 

루이비통의 명성이 상승하게되면서

귀족들의 수요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스페인 왕 알폰소7세, 석유왕 걸벤키엔, 억만장자 루치노 비스콘티 등)

이러한 명성으로 인해 1940년 2차 세계 대전의 발발에도 불구하고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독일이 파리를 점령하면서 파리의 내노라 하는 명품들은 문을 닫게 됩니다.

(이 당시 샤넬 또한 문을 닫습니다.)

하지만 적국인 독일에도 유명했던 루이비통은

전쟁당시 독일군들도 와서 가방을 사갔다고 합니다.

"소프트백의 탄생"

전쟁이 끝난 후 자동차의 대중화로 인해

루이비통의 사각 트렁크 가방은 실용성이 떨어지게 됩니다.

 

이 당시 에르메스가 여행 산업에 눈치빠르게 대처했듯이

루이비통 또한 시대의 변화를 깨닫고 고민하게 됩니다.

 

당시 모노그램 캔버스는 방수코팅으로 인해

소형화 시키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렇게하여 여자들이 간편하게 들 수 있는 백을 제작하게 되는데요

첫 시작은 민무늬의 백이였는데

반응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에 조르주의 아들 가스통 루이비통은

가스통 루이비통

부드러운 모노그램 캔버스 만들기 연구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1932년 가스통은 모노그램 캔버스로 된 첫 번째 소프트백 런칭을 시작하게됩니다.

루이비통의 소프트백 노에

"노에"

발명가 DNA 를 가졌던 루이비통의 가문은 계속해서 소재연구를 해나갑니다.

가스통의 아들

클로드 루이비통 또한 계속해서 소재 연구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1959년 면과 같은 부드러운 소재의 모노그램을 완성하게 됩니다.

파필론백 (1966)

당시 인기 모델이였던 트위기를 위해 디자인된 가방이기도 한 파필론 백이 나오게 됩니다.

 

부드러운 소재로 인해 디자인에 제약이 없어지기 시작한 루이비통 백의 시작이였습니다.

소프트백은 트렁크에 비해 가격도 저렴하며

일상생활의 실용성 두가지 장점으로 인해

인기는 절정에 오르고 이로인해 아시아 시장에도 진출하게되죠

일본에서 루이비통의 인기는 상상을초월할정도 였습니다.

하지만 그가격이 프랑스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쌌기에

일본인들은 루이비통을 구입하기위해 

프랑스로 여행을 하는 시대가 펼쳐지게됩니다.

파리 본점이 프랑스인들이 아닌 일본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이에 1976년 루이비통은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 매장 오픈을 시작으로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게됩니다.

이렇게 루이비통의 연간 매출액은 7천만 프랑을 기록하였고

(당시 한화로는 확인이 어려우나 현재로는 800억이니 그당시 800억이면 엄청난 금액이겠죠?)

 

1985년 에피 라인을 런칭하며 승승장구를 하게 됩니다.

처음으로 가방에 선명한 원색을 도입한 라인으로 가죽에 이삭결물늬가 있는것이 특징입니다.

하지만 루이비통에게도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게 됩니다.

1980년대를 거치게 되면서 루이비통은 질이좋지만

촌스러운 브랜드로 낙인이 찍히기 시작하죠

그 원인은 가족경영에 있었습니다.

 

세상은 빠르게 돌아가며 사람들의 취향은 더욱더 다향해지고

루이비통의 사업은 가족사업으로 인해

명확한 체계없이 가족들끼리 운영하는 가업 형식이였기에 

기업 내 혁명이 없었던 구시대적인 브랜드로 낙인이 찍히기 시작함과 매출은

점점 떨이지기 시작합니다.

 

이때 루이비통을 탐하였던 자가 있었으니

베르나르 아르도

후에 구찌 또한 산하에 두려고했던 

베르나르 아르도 였습니다.

그는 프랑스 국립 행정학교를 졸업한 엘리트였으며

당시 미국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통해 많은 재산을 모은 그는

유럽의 명품 브랜드들이 파산직전시 그들을 차례차례 인수하고 있었습니다.

 

벌처라는 별명을 가진 헤지펀드 엘리엇과 같은 경영방식이죠

엘리엇 창립자 폴 싱어 회장

이어서 그의 베르나르 아르도 그의 케이스를 말하자면 첫번째 상대로

샴페인 브랜드인 모엣샹동과 코냑 브랜드인 헤네시를 인수하였습니다.

모엣샹동과 헤네시

그리고 곧이어 크리스찬 디올까지 인수를 합니다.

그리고 찜해둔 버킷리스트인 

루이비통까지 인수하게 되버리는데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모엣샹동과 헤네시를 루이비통과 합체

그 이름도 유명한 

새로운 전세계 거대 럭셔리 기업

" L V M H"

당시 대부분의 유럽 명품 브랜드들은 전문적인 마케팅없는 

순수 기업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프랑스 출신이지만 미국식 경영방식을 공부한

베르나르 아르도는 그들의 위기가 다가올때마다 틈새를 공략하여 사업을 인수하였습니다.

당연히 프랑스인들은 그를 좋아할리가 없었죠

이외 태그호이어 , 베네피트 , 메이크업포에버등 ,LVMH 그룹의 산하아래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이 경영능력을 보면서 그런 비난은 수그러들게 됩니다.

다 망해 쓰러지기 직전이던 브랜드가 그의 경영 수완으로 엄청난 가치의 세계적 브랜드로 탈바꿈 되기 때문이죠.

전문적인 비지니스 체계 속에서 루이비통은 전세계 130여 개의 매장을 소유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LVMH 그룹이 소유하게 된 루이비통 이야기 

다음 포스팅에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브랜드스토리의 마스터 피스였습니다.

2부는 다음주월요일에 올리겠습니다!

내일은 최근 패션계를 뒤흔들고있는 칸예웨스트 그의 스토리를 해보려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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