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오 구찌 구찌의 첫번째 이야기 (브랜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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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뉴스

구찌오 구찌 구찌의 첫번째 이야기 (브랜드이야기)

by 오늘맑음🌞 2019. 11. 4.

안녕하세요 브랜드스토리를 이야기하는 

마스터피스 입니다.

첫번째이야기인 구찌오 구찌의  구찌

구찌갱을 있게해준 구찌 많은사람들이 입고 즐기는 구찌

최근 많은 여자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무대의상이나 레드카펫 등에서 구찌의 옷을 입은 모습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며 많은 화제를 끌고 있는데요.
포털사이트에서 해당 아이돌의 이름을 검색하면 '구찌'라는 검색어가 자동으로 붙기도 하는 등
브랜드에 대한 관심도가 매우 높아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구찌에 관련된 많은 정보 중 역사와 그 시작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는데요,
과연 이 구찌라는 브랜드는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구찌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이탈리아 장인정신으로 구찌는 마구사업으로 시작해

가죽제품의 라인으로 가방과 구두 클래식한 제품라인 시그니처 아이템을 탄생시켰습니다.

 

오드리 햅번, 그레이스 켈리, 재키 케네디 등

세기의 패션 셀러브리티들이 사랑했던 브랜드인 구찌입니다.

 

현재 우수한 품질과 전통을 지켜나가면서도 트렌드의 변화에 민감한 브랜드로 여겨지는 구찌이야기입니다.

피렌체

이탈리아 피렌체에 구찌 가문이 있었습니다.

 

이 집안의 가족사는 좋지않았습니다.

특히 형제들은 유독 사이가 좋지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형제 중 한 명인 구찌오 구찌는 화를 참지 못하고

집을 떠나게됩니다.

1898년

이탈리아를 떠난 구찌오 구찌는 영국 런던으로 떠나

그곳에서 샤보이 호텔의 벨보이로 일하게 됩니다.

호텔에는 상류층 고객들이 많이 드나들었고

 

항상 이들의 가방과 트렁크를 옮기는 일을 하던

 

벨보이 구찌오 구찌는

가죽제품에 흥미를 갖게 됩니다.

 

한 번 가죽 제품에 관심이 생기자 일하는 내내 그는 손님들의

가죽신발, 가방, 트렁크밖에 보이지않게 됩니다.

 

귀족들이 애용하는 고급 제품들을 항상 관찰하다보니

자연스레 상류층 취향과 고급스러운 안목을 가지게 되었고

그의 머리속에는 오직 가죽 제품이 떠돌아 다니게 됩니다.

 

말그대로 가죽성애자가 됩니다.

그러다가 가죽에 대해 배워보기로 결심을 하게됩니다.

 

그는 고향 이탈리아로 돌아와

가죽 수공예업체인 프란지에 들어가 가죽다루는법을 배우게 됩니다.

당시 주요 교통수단은 말과 마차였기에 1906년 피렌체에 

작은 마구상을 오픈하게 됩니다.

이탈리아의 마차

그는 승마용 가죽 제품을 만들어 팔았는데

깔끔하고 퀄리티좋은 제품으로 기수들과 귀족으로부터 인정을 받고난후

인기있는 상품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기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상류층의 스포츠로 승마 대신 자전거가 유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을 본 트렌드세터 구찌오 구찌는

마구상을 접고 가볍게 들고다닐 수 있는 가방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서도 그의 감각이 빛을 바랬습니다.

쉽게 포기할수없고 쉽게 도전할수없는 일을 그는 바로 실천에 옮긴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1921년 구찌오 구찌는 고향인 피렌체에

구찌라는 이름의 작은 가방가게를 오픈하게 되는데

 

이것이 현재의 구찌의 시작입니다.

샤보이 호텔에서 상류층의 트렌디를 익혔던

그는 자연스레 귀족들을 위한 우아하고 고급스런 제품들을 디자인하고

만들어 귀족들과 상류층들에게 선보이면 많은 인기를 끌게됩니다.

 

사업은 점점 번창해지고 1938년 부티크를 로마로 확장 오픈하였고

이곳은 곧 새로운 쇼핑명소로 탄생하게 됩니다.

좌_구찌의 창립자 구찌오 구찌와, 그의 아들인 로돌프 구찌가 이탈리아 피렌체의 구찌 매장 앞에 서 있는 모습(1940)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구찌는 이탈리아 내에서만 

유명한 국내 브랜드에 불과하였습니다.

구찌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건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부터입니다.

물자가 부족해지면서 가죽 역시 예전만큼 쉽게 구할 수 없었고

많은 가죽제품가게들이 도미노 형태로 문을 닫았습니다.

 

구찌 역시 그 영향을 피해갈수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할수없었습니다.

 

그는 가방에는 오로지 가죽을 사용해야한다는 편견을 없애고

 

열을 이용해 직선으로 쭉 뻗은 대나무를 둥글게둥글게

굴린 그는 이를 가방의 손잡이로 만들게됩니다.

그것이 바로 구찌의 유명한 뱀부백입니다.

 

구찌 뱀부백

뱀부백은 국내에서도 이영애가방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유명한 가방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뱀부백은 출시하자마자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아이템이 되면서 구찌를 순식간에

월드클래스 명품 브랜드로 만들게됩니다.

 

특히 그레이스 캘리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등

당시 셀러브리티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뱀부 스타일은 

벨트와 시계에도 적용되게 됩니다.

구찌 뱀부 벨트
구찌 뱀부 시계

가죽의 품귀 현상으로 탄생한건 이 뿐만이 아니였습니다.

 

가죽 대신 대마에 다이아몬드 패턴을 직조하는 방식을 발명하여

디아만테 diamante 캔버스를 만들었습니다.

구찌 디아만테 가방
구찌 디아만테 지갑

한편 에르메스가 그랬듯이 마차와 승마가 흔하던 시절

마구 제품은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는 주요 소재였습니다.

 

구찌 역시 그는 안장의 발판에서 영감을 얻게 되며 새로운 아이템들이 탄생을 하게되죠

안장의 발판에서 영감을 얻은 구찌오 구찌는 

 

홀스장식을 1950년대에 가죽 핸드백에 처음 사용된 후 다양한 구찌 제품에 적용시키게됩니다.

구찌 홀스빗 가방
구찌 홀스빗 로퍼

 

1953년에 남성용 슈즈 장식으로 홀스빗이 사용되었는데

당시 존 웨인,클라크 게이블 같은 스타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현재까지도 구찌의 클래식 로퍼의 대표적인 장식으로 사용되고있습니다.

(Green Red Green)

또한 홀스빗뿐만 아니라 

구찌의 대표적인 상징이 탄생한 일화로는 

말의 안장끈을 변형시켜 GRG(Green Red Green) 가죽 끈인 "웹"을 만들게 되는데

오늘날 이 컬러디자인 웹은 

명품브랜드 구찌를 떠오르면 '삼선'이 떠오르게하며

삼선 하면 '구찌'를 떠오르게합니다.

 

1953년 구찌의 수많은 아이콘을 창조한 구찌오 구찌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현대의 구찌의 시작

구찌오 구찌의 사망 후 구찌의 사업은 그의 가족들이 물려받게 됩니다.

그에게는 아이다 칼벨리를 비롯 총 4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알도 구찌

 

둘째 아들인 알도는 미국에 첫 번째 매장을 오픈하면서 구찌를 국제적으로 확장시키는 

첫 스타트를 끊었습니다.

이어 홍콩과 도쿄에도 매장을 오픈하면서 아시아에 진출하였습니다.

이때쯤 가방의 잠금 장치 용도로 구찌의 대표 로고인 GG아이콘이 탄생하게 됩니다.

GG

구찌오 구찌의 이니셜에서 따온 디자인으로

오늘날 현대인들은 이 디자인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고

수많은 카피제품과 비슷한 문양의 브랜드 상품들이 나오게됩니다.

이후 GG로고는 캔버스 천에도 프린트되어 구찌의 제품의 다양성을 보여주게됩니다.

구찌 GG 자켓

전 세계 영화배우를 비롯한 유명 셀럽들이 착용한 모습이 대중들에게 보여지면서

럭셔리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지금도 많은 브랜드들이 셀럽을 컨택해 마케팅을 하듯

구찌도 셀럽 마케팅에 성공을 하게된것이었습니다.

재키백

구찌가 이때쯤 새로 발표한 숄더백은

 세기의 아이콘인 

존F. 케네디의 대통령의 부인인

재키 케네디가 즐겨 들어서 

재키 백이라 불리며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레이스 켈리

유명인에 의해 빛을 발한 것이 재키 백 이라면 처음부터 유명인사를 위해 탄생한 아이템도 있었습니다.

 

1966년 여배우였던 모나코의 왕비 그레이스 켈리가 

밀라노 매장에 방문하게 되는데

여기서 네 아들 중 막내인 로돌포 구찌가 맞이하게 됩니다.

로돌포 구찌

로돌포 구찌는 뱀부 백을 사러온 그레이스 켈리를 보고 반하여

선물을 해주기 위해 그레이스 켈리에게 어떤 제품이 갖고 싶냐고 물어봤는데

이때 그레이스 켈리는 꽃무늬 스카프를 받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구찌에는 꽃무늬 스카프가 없었습니다.

 

선물을 못한 로돌포 구찌는 곧바로 구찌의 일러스트레이터인 

비토리오 아코르네로에게 연락하였습니다.

 

다음날 

비토리오는 색색깔의 꽃들이 아름답게 뿌려진 디자인을 가지고 왔습니다.

구찌의 플로라 스카프

이것이 바로 구찌의 또 다른 아이콘 플로라의 시작이였습니다.

 

이 플로라 패턴은 곧바로 큰 인기를 얻으며 유럽여성들에게 품절대란을 일으켰고

시대를 거처 딸들에게 물려주는 가보형식이 될 정도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습니다.

플로라 향수 플로라 가방 플로라 드레스

 

이렇게 뱀부백에서 시작해 홀스빗 GG로고 GRG컬러 플로라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아이템을 탄생시킨 구찌는

1960년대와 70년대를 거쳐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럭셔리 브랜드이 상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형제 간의 다툼은 구찌 집안의 내력인지

구찌의 창시자 구찌오 구찌의 형제들과 같이

그의 아들들의 싸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알도와 로돌포 구찌의 싸움은 너무나 치열해서 악명이 높을 정도였습니다.

 

사소한 매장운영에서부터

재산상속과 주식 소유 문제까지 마찰을 빚게 됩니다.

 

둘째아들 알도는 막내인 로돌포의 경영권을 어떻게든 축소시키려고 했습니다.

 

알도는 로돌포를 밀어내기 위해 비밀작전을 펼치게되죠

알도는 자신의 아들인 로베르토에게 향수코너를 맡기게됩니다.

향수코너를 맡기자마자 향수 제품이 포함된 구찌의 악세사리 라인 홍보에 총력을 다하게 됩니다.

 

악세사리 라인을 밀어주면 그 라인에 속해있는 향수라인도 잘 팔리게 되고

로베르토의 입지가 높아지며

로돌포의 입지를 줄여나가기 위한 작전이였던것입니다.

 

예상대로 악세사리 라인은 높은 매출을 기록하게되고

몇년이 지나지않아 다른 악세사리 제품보다 향수는 월등한 매출을 기록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건 문제의 시작이 됩니다.

 

판매율을 높이기 위해 무분별하게 남용한 라이센스가

구찌의 명성을 깎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여러브랜드에서 하는 실수들이죠

 

특히 과거에는 장인들의 제품으로 여겨저 함부로 구입할 수 없는 이미지의 구찌였지만

향수는 그와 상관없이 대량으로 공장생상할수있고

미국에서만 1000개가 넘는 매장에서 판매하게되며

흔하디 흔한 제품이 되어버린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알도의 또다른 아들 파울로 구찌가 문제를 일으키게되죠

 

파울로 구찌는 그 당시 구찌의 디자이너였는데

파울로는 회사에 기여도를 위해 

장인정신의 구찌를 세컨라인을 만들어 구찌의 이미지를 떨어트리는 실수를 하게됩니다.

 

그이름은 '구찌플러스'입니다.

파울로는 구찌플러스로 저렴한 가격의 구찌제품을 마구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구찌플러스

 

결국 구찌의 이미지는 크게 손상되고

이에 화난 알도 구찌는 파울로 구찌를 해고합니다.

 

이에 화가난 파울로 구찌는 

알도 구찌의 탈세를 국세청에 신고하게되고

이에 알도 구찌는 교도소에 수감이됩니다.

 

이러한 일을 가만히 둘 매스컴이 아니었기에 

당시 구찌 집안의 싸움판을 기사로 내보냈고

구찌의 디자인 만큼이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듭니다.

 

또 로돌포 구찌에게는 마우리치오 구찌라는 아들이 있습니다.

마우리치오 구찌

로돌포 구찌는 죽으면서 마우리치오 구찌에게 자신이 가진 50%의 구찌 지분을

상속하며 자연스럽게 마우리치오 구찌는 최고 경영자가 되었습니다.

마우리치오 구찌는 젊은 시절 한 여인에게 빠진 로맨티스트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은 그 사랑을 반대하였습니다.

이유는 여자의 집안이 귀족도 상류층도아닌 세탁소집의 딸이였기에 

가족들의 반대가 심했죠

 

마우리치오 구찌와 파트리치아 레지아니

그렇게 순수하고 서로 사랑하던 그녀

파트리치아 레지아니는 상류층의 허영과 사치에 물들어가고 망가지고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느새 하이패션계의 셀러브리티로 상한가를 마감하며

이탈리아에서 다섯번째로 부유한 아내로 화려한 삶을 즐기기 시작했지만

 

하지만 알도의 수감 사건을 포함하여 구찌의 명성에대한 생명이 망가질대로 망가지며

부부 사이의 불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마우리치오 구찌는  구찌의 명성을 되찾기위해 

가족들을 설득하였습니다.

 

가족의 동의를 얻은 그는 구찌의 지분 50%를 아랍계 투자 회사인

인베스트코프에 팔아버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계획대로 되지않고 회사의 사정은 전혀 좋아지지않았습니다.

 

파산 직전까지 몰리게 되자 가족간의 불화는 정점을 찍게됩니다.

재정문제로 가등이 깊어질때로 깊어졌던

파트리치아와 마우리치오도 결국 이혼을 하게 됩니다.

 

허영심과 사치심으로 가득햇던 파트리치아는 이혼을 하며

더이상 패션계의 그무엇도 아닌 더이상 돈을 만질수없다는

얘기를 들은후 파트리치아는 복수심으로 가득찬 사람으로 변하게되고

 

벼랑끝에 서있던 마우리치오는 결국 나머지 지분50%를 투자사에게 넘기게 되었고

결국 지분을 투자사에게 올인해버린 구찌는 

전혀다른 회사의 운영으로 구찌라는 브랜드만 남아있게됩니다.

 

그렇게 1995년 3월 마우리치오는 괴한의 총격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사망기사

 

이 모든의 배후에는 파트리치아가 있었습니다.

청부살인으로 마우리치오를 사망하게 만든것이었죠

 

경찰에게 잡혀가는 순간마저 모피코트를 입고나가야하니 기다려달라고한 그녀를보면

얼마나 탐욕스럽고 허영심으로 가득찬 그녀인지 알것같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스캔들을 만들어낸 구찌

이렇게 바닥까지 추락해버린 구찌

어떻게 지금도 이렇게  명품브랜드의 위치를 굳건하게 지키고있는지

다음 포스팅에서는 현재의 명품브랜드 셀럽아이템 구찌의 이야기를 이어가도록하겠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셧다면 하트♥ 부탁드립니다^^

마스터피스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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