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이야기 발렌시아가 브랜드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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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뉴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이야기 발렌시아가 브랜드스토리

by 오늘맑음🌞 2019. 11. 5.

2016년 뎀나 즈바살리아 디자이너의 선임으로

명품계에서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이하기 시작한

발렌시아가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발렌시아가의 첫걸음"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1895년~1972년

쿠튀리에는 설계에 있어서는 건축가여야하고,

형태에 있어서는 조각가여야 하며 , 색채에서는 화가,

조화에서는 음악가 그리고 절제에 있어서는 철학자여야한다.

 

발렌시아가는 "파리 모드계의 교황"

별명이 있습니다.

 

디자인에 있어서

우아하고 절제된 건축적인 디자인

그리고 완벽한 기술을 추구합니다.

 

발렌시아가는 어떤 디자이너도 따라올 수 없을만큼

천재적인 재단기술은 독보적이였습니다.

 

1895년 1월21일 스페인 구타리아에서 태어난 발렌시아가는

어촌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어부였으며

어머니는 재봉사가 직업이셨습니다.

 

어릴때부터 늘 어머니의 일터에서 놀러가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에 일터에서 어머니를 도와 재봉을 해보겠다고 한 그는

재봉질에 재미를 붙였고 실력또한 상당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 일을 도와주기 시작한 그는

13살이 되던 해 그의 인생을 뒤바꾸어놓을 

운명적인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해변가에 놀러온 귀족인 카사 토레스 후작 가족들을 만나게 되고

그의 손주들과 우연찮게 놀게됩니다.

 

발렌시아가를 맘에 들어했던 손주들은 자신들의 별장에 초대하게 되고

거기서 후작부인의 오트 쿠튀르 드레스를 본 

발렌시아가는 직접 그 드레스를 똑같이 만들어보고 싶어

빌려줄 수 없냐고 제안합니다.

 

후작부인은 어린아이가 장인이 만드는 드레스를

신기해 했나보고 빌려주게 됩니다.

 

후작부인은 발렌시아가가 만든 드레스를 보고 놀랐습니다.

장인이 만든 드레스보다 깔끔한 마감처리에 놀랐던거죠

부티크에 요즘말로 낙하산으로 취업을 시켜주게됩니다.

 

그 덕분에 어린나이부터 부티크에서 일하게 되면서 다양한 

테일러링 기술을 익히며 디자이너로서의 꿈을 키워갑니다.

 

그리고 17세가 되던해 그당시 패션의 중심인 프랑스에 진출하기위해

불어 공부를 시작하죠

이후 1919년 발렌시아가는 세바스찬에 자신의 부티크를 오픈했으며

 

마드리드(1933년)와 바르셀로나(1935년)에도 숍을 차릴정도로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그 당시 부티크를 운영하며

재단과 구성테크닉은 신의 경지에 다다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강박적이라고 할만큼 옷의 완성도에 집착하는 완벽주의자가 되어가고있었습니다.

그러한 그는 곧 스페인 최고의 디자이너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그러나 

1937년 스페인 내란으로 인해 더 이상 옷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없어지고

스페인에서 부티크를 닫게 된 발렌시아가는

 

프랑스 파리에 도전하게 됩니다.

1930년대 파리는 

샤넬, 디올,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열정이 가득한 디자이너들을 비롯해 

파리지앵들로 거리가 넘쳐나는 도시였으며 

 

프랑스 정부는 의류 수출로 들어오는 수입이 굉장했기에 

오트 쿠튀르를 지속적으로 지원했으며

 

그 결과 파리는 세계패션의 중심지가 된 시기였습니다.

1930년대 파리

이런 파리에 1937년 프랑스 출신이 아닌 외국인 디자이너 발렌시아가는

자신의 이름으로 첫 부티크를 오픈하게 된것 입니다.

발렌시아가 역사의 시작인 순간입니다.

 

스페인에서는 명성있는 디자이너였지만 

프랑스에서는 생소한 이름이였던 발렌시아가는

 

파리 모드계의 교황이라는 칭호를 받게되며

전설의 시작이 됩니다.

 

첫 파리 컬렉션에서 

스페인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은 발렌시아가의 

디자인은 파리지앵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인판타 드레스

실키 새틴과 벨벳으로 만든 인판타 드레스는

17세기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의 스페인 공주 초상화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 하였습니다.

 

언론사들은 그의 컬렉션에 열광하며 기사를 여기저기 쏟아냈고

그는 쇼를 치루자마자 하루만에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재 부족으로 많은 디자이너들이 문을 닫는 시기에도

발렌시아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족한 양의 원단을 가지고도 볼륨있는 옷을 만들수있는 방법을 연구하여

많은 천을 겹치지않고도 풍성한 실루엣을 만드는 테크닉을 터득하였습니다.

 

암울했던 전쟁시기를 오히려 발렌시아가는

자신만의 기술을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발렌시아가는 다른 디자이너들과 달리

스스로 직접 드레이핑 과 재단

손바느질까지 완벽하게 할수있는

몇 안되는 쿠튀리에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디자인을 스케치하기만 하고 

옷을 직접 만들지 않는 디자이너들이 많았습니다.

 

이에따라 재단지식이 부족한 디자이너들은 실루엣창조에 애를 먹었지

발렌시아가의 테크닉과 지식은 다른 쿠튀리에들이 시도조차못하는 

다양한 볼륨감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파리패션계의 유행은

크리스찬 디올이 주도 하고있었습니다.

크리스찬 디올

그 당시 디올은

뉴룩을 통해

모래시계 형태와 같은

굴곡이 있는 라인을 유행시키고 있었습니다.

크리스찬 디올의 뉴룩

발렌시아가는 유행을 쫒지 않고

오히려 뉴룩 트렌드를 비웃는듯이

전혀 반대의 실루엣인

와인통 실루엣(BARREL WINE)을 발표하였습니다.

발렌시아가의 코쿤라인

코쿤라인라고 불리우는 룩은

허리가 잘록한 뉴룩과는 정반대인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항상 다른 디자이너들보다

10년은 디자인을 앞서나갔습니다.

그렇기에 당시에는 괴짜로 느껴질 수도 있었습니다.

 

1940년대에 디올이 발표한 뉴룩을 발렌시아가는 1930년대에 이미 만들었었고

뉴룩이 한창 인기를 얻고 있을때

그는 10년뒤에 유행한 SACK드레스를 (형태가 없는 벙벙한 실루엣의 원피스)

만들고 있었습니다.

발렌시아가 SACK 드레스

그는 항상 다른 디자이너들보다

몇 단계식 앞서간 트렌드로 인해 보그는 이런 그를

"예언의 불꽃"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시대를 앞서감에 따라 정작 주목받는것은

발렌시아가가 아닌 뒤늦게 그런 디자인을 선보인 다른 디자이너들이 주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1947년 발렌시아가는

자신의 첫 향수 르 딕스 Le Dix 를 발표하였는데

 

향수계의 1위 샤넬 No.5 아성을 위협할 정도였습니다.

 

유행을 따르지 않는 발렌시아가는 1950년대를 거치며

점점 대담해지고 비대칭적인 놀라운 실루엣을 선보이게 됩니다.

 

발렌시아가의 이브닝코트

 

소매가 풍선처럼 부푼것이 특징인

이브닝코트는 스페인화가 고야가 자주 사용하던 색상인 진붉은 색의 벨벳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브닝드레스

플라멩고 드레스에서 영감을 얻은 이브닝드레스는

그당시 여성들의 칵테일드레스 1순위로 인기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 1960년대를 맞이하면서

발렌시아가의 의상은 이전의 풍성한 실루엣에서

직선적이고 단순하고 건축적인 디자인을 많이 하였습니다.

심플한 색상의 단단하고 두꺼운 직물을 이용해 솔기와 다트에 마법을 부리며

우하한 의상을 만들었으며

 

매번 컬렉션을 통해

곡선과 직선의 절제미가 빼어난 실루엣을 창조하였습니다.

다른 디자이너들에게 그의쇼는 꼭 봐야할 수업과도 같았습니다.

 

이렇게 그는 패션꼐의 전설이되어 어느새

샤넬의 위치까지 순식간에 올라가버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역시 

발렌시아가만이 진짜 쿠튀리에라고 샤넬이 인정을하며

그에 비하면 다른사름들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 불과하다며 인정을 하게되었죠

 

여성들은 그들 각자의 스타일을 이해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가장 잘 찾아주는 그런 디자이너를 

만나야 합니다.

-발렌시아가-

 

그 당시 발렌시아가의 옷은 여성들에게 완벽한 몸매를 요구하지않았습니다.

발렌시가의 옷은 그당시의 셀러브리티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중 한명은 재키 케네디가 있었습니다.

좌 재키 케네네 우 케네디역의 배우

영부인이 사치스럽다고 소문나면 안됬기에 

그녀는 발렌시아가의 의상을 구입할 때 그것을 감추기 위해 

종종 의상비 청구서를 그녀의 시아버지인 조셉 케네디의 이름으로 하고는 했습니다

"발렌시아가의 제자"

또한 발렌시아가는 다른 쿠튀리에들으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지방시,쿠레주,옹가"등이 있습니다.

또한 크리스찬 디올은 발렌시아가를 모든 디자이너들의 마스터라고 했죠

 

이중 "지방시"의 경우

발렌시아가가 특히 아끼던 제자중에 한명입니다.

한편 발렌시아가는 성격 또한 독특하고 유별나기로 유명했습니다.

"발렌시아가의 성격"

그는 항상 비밀스럽고 남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은둔형이였으며

자신의 컬렉션이 있는 날이면 혼자 백스테이지의 커튼 뒤에서 자신의 쇼를 훔쳐보았습니다.

그는 세상일에 관심도 없었으며 이런 수수께끼같은 성향에

세상은 오히려 그를 신비롭게 여기게되고 따르게만들었습니다.

 

그는 특히 패션지나 신문과 같은 언론과 광고를 증오할정도로 싫어했습니다.

 

1957년 이후부터 그의 컬렉션에 언론사 사람들은 아예 출입도 못하게되었죠

 

또한

고객들과 바이어들에게 옷이 배달되기 전까지는 절대 언론에 자신의 새 디자인을 공개하지않았습니다.

이는 패션소가 열린 후 잡지에 실린 자신의 옷이 대량 카피되는 사태를 막기위한 것이기도 했고

당시 디올이 발렌시아가의 실루엣을 따라한다는

의심에 디자인을 숨기려는 의도라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이런 발렌시아가는

프랑스 오트 쿠튀르에 

기여한 큰 공헌을 인정받아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으며

프랑스 패션 역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발렌시아가의 은퇴"

1968년 돌연 은퇴를 선언하게되는 발렌시아가입니다.

그 이유는 시대가 변하면서 오트 쿠튀르는 점점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고

간편하게 만들어지는 프레타 포르테가 패션의 중심에 서게 되면서 부터입니다.

이당시 프랑스를 넘어 전 세계 패션계에 큰 충격을 가져옵니다.

심지어 그의 vip고객이던 모나 비스마크 백작부인은 그의 은퇴소식에 

충격을 받아 지신의 방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1972년 3월 24일

그는 스페인 자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의 마지막 행보는 코코 샤넬의 장례식에 참여한것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발렌시아가가 없는 발렌시아가는 

예전의 왕좌를 유지할수 없게됩니다.

 

"발렌시아가의 부활"

그러다 발렌시아가가 다시 빛을 발하게 된시작은 

1996년 26살의 프랑스 디자이너 

니콜라스 게스키에르를 만나면서 부터였습니다.

니콜라스 게스키에르

그의 가장 대중적인 히트는

모터사이클백입니다.

일명 "모터백"으로 많이 불리웁니다.

모터백

이는 출시되자마자 최고의 잇 아이템으로 자리매김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파파라치들의 사진 어디에서나 이 가방을 든 할리우드 스타들을 볼수있었습니다.

 

2006년에는 니콜 키드만이 발렌시아가의 니콜라스 게스키에르가 디자인한 웨딩드레스를입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게스키에르는 2013년 발렌시아가를 떠나게 되고 

LVMH의 산하인 루이비통의 크리에이티브 티럭터로 임명되게 됩니다.

"짤린 디자이너 알렉산더 왕"

알렉산더왕은 현재 아디다스와 꾸준히 협력관계로 디자인을 내고있습니다.

알렉산더왕

게스키에르의 후임으로는 영국인 패션 디자이너가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그자리는 알렉산더 왕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름에서 보이듯 중국계 미국인으로

2007년 20살이 조금 넘은 나이에 자신의 패션하우스를 열어 성공을 거둘 만큼

성공한 남자입니다.

국내에서는 제일모직과 신세계 인터내셔널이 알렉산더왕의 독점판권을 두고 싸웠을 정도로 

알렉산더왕의 한국에서의 인기는 좋은 편입니다.

 

당시에는 뉴욕 패션위크의 신성이나 다름없는 스타디자이너였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왕의 경우

2016년 봄/여름 컬렉션을 마지막으로 

발렌시아가에서 짤리게 됩니다.

[2015년 7월 29일 퇴사]

해고 이유는

발렌시아가의 오트쿠튀르적의 느낌보다는

상업적인 디자인을 계속해서 보여준다는점과

디자인들을 너무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무채색의 색상위주 컬러선정과

매 컬렉션마다 반응이 좋지않게되면서 해고당하게 된것이죠

 

알렉산더왕의 경우 마크 제이콥스와 비슷한 상업성이 들어나는 뉴욕 레이블 디자이너이기에

오트 쿠튀르와는 맞지않는 정반대의 성향의 디자이너로써 성공시키지못한것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알렉산더왕의 코쿤라인

"현재의 발렌시아가"

현재의 발렌시아가 명품계에서 원탑자리를 지킬수있게 만든 신의한수는

뎀나 즈바살리아입니다.

알렉산더왕이 물러난후

뎀나 즈바살리아

뎀나 즈바살리아가 

발렌시아가의 디자이너로 선임되게 됩니다.

 

이 계기로 인해 발렌시아가는 과거의 명성을 다시 되찾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1981년생의 조지아 국적의 그가

유명해지기 시작한건

베트멍의 시작부터였습니다.

그는 마틴 마르지엘라에서 3년간 일했으며 루이비통으로 이직 후에

친구들과 함께 패션위크를 구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상업적인 목적보다는 

예술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디자이너입니다.

 

뎀나 즈바살리아는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수단을 패션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오버사이즈의 옷을 많이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모습은 강직하지만 주관적으로 삶을 개척해나가며 성장하는 모습을 담고있다고 생각하며

그런 태도를 지향한것이 자신이 원하는 태도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의류 브랜드 꼼데가르송을 자신이 원하는 태도라고 말합니다.

베트멍 타미콜라보 /베트멍 후드를입은 칸예 웨스트
베트멍 레인코트 / 베트멍 람슈타인 후드

베트멍은 주로 오버사이즈의 형태의 옷을 보여주고있으며

무언가 과장된 모습을 많이 보여줍니다.

이런 뎀나 즈바살리아가 발렌시아가에 오게되면서 

패션 트렌드를 주도하게되었던 것이죠

뎀나 즈바살리아의 힙함과 발렌시아가의 절제가 만나게됩니다.

발렌시아가 웨이브로고 후디

발렌시아가의 부활이 이루어지기전

패션계에서는 과거 유행하였던

빅로고 패션자체가 고전의 스타일로 여겨졌엇는데

뎀나 즈바살리아는 과감하게 빅로고를 사용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웨이브로고는 미국의 정당을 패러디한 로고로써 

명품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을 보여줍니다.

"삭스러너의 선두주자"

 

스피드러너

발렌시아가에서 삭스러너(양말과 신발이 합쳐진 모양의 신발)

신발의 밑창과 양말소재의 재질로 이루어진 삭스러너는

초기 발매와 당시에 엄청난 열풍을 이루어냅니다.

그 이후 프라다에서도 삭스러너를 발매하였고 

명품계이후에 일반적인 스포츠브랜드에서도 삭스러너 열풍에 동참하게되죠

 

'이후 어글리슈즈의 선두주자로 다시 앞서나간 발렌시아가"

2017년 어글리슈즈는 스니커즈계의 현재의 트렌드가 되었습니다.

말그대로"못생긴 신발 "

발렌시아가 트리플S

국내에서는 패셔니스타 지드래곤이 군입대전 자주 신었던 제품이며

해외에서는 이미 발매전 트리플S에 대한 의구심과 더불어

인기와 관심이 엄청나게있었습니다.

국내에서 불을 지핀건 지드래곤의 효관도 있었으나

이미 해외에서는 엄청난 열풍이였습니다.

어글리슈즈의 첫 시작점인 

발렌시아가의 트리플S의 시작으로

구찌에서는 라이톤이라는 어글리슈즈를 

구찌 라이톤

루이비통에서는 아치라이트라는 슈즈를

루이비통 아치라이트

수많은 명품브랜드 스포츠브랜드 캐쥬얼브랜드에서

어글리 슈즈를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그 인기는 현재도 식지않고 이어져오고 있죠!

 

"이후의 발렌시아가"

현재는 발렌시아가의 대표적 디자인인 트리플S이후

발렌시아가 트랙슈즈

또 다른 디자인의 어글리슈즈 트랙슈즈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임팩트들이 너무나 강했기에

현재 트리플S만큼의 인기는 얻지못한것으로 보여지나

이제는 더이상 어떤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디자인으로

패션계에 트렌드를 이끌어갈수 있을지 지켜봐야할것같습니다.

 

현재 발렌시아가는 이태리 생산공장에서 ---->중국생산공장으로 옮기게되며

많은 팬들과 셀럽들에게 좋지못한 소리도 들었습니다.

퀄리티에 의문점도 생기며 높은 자리에 올랐을때 좋지 못한 선택을 한것은 아닌지

생각하게됩니다.

 

현재는 디자인 외에 제품들의 실질적인 실용가치가있는지에 대한 의문점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발렌시아가의 명성을 뎀나 즈바살리아가 어떻게 이끌어나가는 기대됩니다!

 

"역사상 최고의 디자이너였던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발렌시아가 이야기였습니다."

이야기가 재미있으셨다면 하트♥ 부탁드립니다^^

다음 포스팅은 루이비통으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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